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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종 개인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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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종 개인전이 9월 3일부터 11일까지 O's Gallery와 O's Gallery 두 곳에서 열리고 있다.
김석종 개인전 "Beyond the Hills"
O's Gallery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409번지 063 244 7116)



김석종 개인전 "Tree Lights"
O's Gallery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 1층 063 274 5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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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김석종 010 3735 0071 이문희 큐레이터 010 3541 7941
김석종작가는 연세대와 미국 일리노이대를 졸업하였고 국내외 10회의 개인전과 선교전등 다수의 그룹전을 통하여 형태의 변화와 섞임, 중복촬영과 분해, 다중노출의 과정을 통한 대상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재창조의 기쁨을 통해 우리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자극하는 작품들을 보여주고있다.
살아 숨쉬는 풍경 최건수비평
사진집을 뒤적이다가 발견한 것 중 하나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사진가들은 풍경에 이끌린다는 것이다.
텐느(H.Taine)는 예술을 이야길 할 때 종족, 환경, 시대를 종합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지만 거기에 나이 하나를 더 추가하면 어떨까 싶다.
40대 중반은 사진기를 메고 도시를 배회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 아닌가? 가난한 변명이지만, 40대란 무엇을 욕심내는 연령층이 아니다. 지연 앞에 겸허하게 서서 삶에 순응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때가 아닐까? 사진을 잘 찍으면 무얼 얼마나 잘 찍을 것이며, 유명세를 타면 얼마나 유명해지겠다는 것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 찍고, 기회가 되면 그동안 찍어둔 것 한번 펼쳐 보이는 것이지.
어깨에 주었던 힘 모두 빼고, 세상 살면서 아물 날 없는 상처 덧나지 않도록 다독거리며 사는 것이지.
풍경은 나이 찬 사진가들에게 괴로운 현실과 저 자신을 합치시키는 깨달음 하나를 슬며시 건넨다.
그러나 김석종에게 풍경은 낯선 것이 아니다. 젊은 날에 방기되었던 풍경이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새롭게 친화력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밀려드는 풍경의 울림에, 김석종은 자신의 투명한 바이브레이션을 오래도록 삼투시켜왔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의 사진기에 걸러진 풍경은 애잔하면서도 빛이 곱다. 방 한쪽에 걸어두면 그 빛을 방안 전체가 화사해질 만큼 싱싱한 풍경이다. 늙지 않는 풍경이다.
1980년대 하반기부터 시작된 작업은 한결같이 풍경만 고집해왔기 때문인지 10년 전의 젊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진 찍기의 초기에서부터 융통성 없이 풍경만을 지켜온 사진가이기에 그만큼 작가의 이미지는 견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 기간 동안 사진 찍기 방식은 몇 차례 변화했다. 초기에는 김석종도 대상 의존적이었다. 자연 그 자체는 작업의 소재이고 주제로서 존중되었다. 그러나 이 사진들은 내가 아는 한 국내에서는 발표되지 않았다. 어쩌면 고립된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풍경이란 자신의 의식과 대상간의 그 만큼 긴장의 탄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해서일까? 그 이후 정지된 대상에 움직임을 주는 테크닉을 적극 도입하게 된다. 다중 촬영, 팬닝, 팬닝과 다중 촬영의 결합 등이다. 그러나 최근의 사진을 보면 동적 표현에서 정적 표현으로 다시 회귀하고 있다. 그는 요즈음 경주의 옛 무덤을 많이 찍는다. 무덤의 둥근 곡선을 이용해서 상하로 다중 촬영을 하고 있다. 그 효과는 마치 색 리본을 하늘에 매달아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어, 시각적으로 안정적이면서 유연한 구성과 색의 조화로 상큼하다. 다중 촬영을 통해 원하는 대로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솜씨와 섬세한 관찰력이 놀라울 뿐이다.
예술을 통해서 느끼는 것은 첫째가 미적 즐거움이고 둘째가 예술가의 창조적 힘일 텐데 김석종은 자신의 사진 언어를 통하여 세상에 있는 풍경을 세상에 없는 풍경으로 바꾼다. 자연의 혜택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감정의 표피를 스쳐 지나갈 뿐인 캘린더 풍경을 밀어 버린 자리에. 그것으로부터 추출된 아름다움을 채워놓는다. 풍경사진가들은 의도하는 것을 찍기에 앞서 놓여진 날풍경의 유혹을 먼저 받는다. 김석종 사진의 아름다움은 유혹을 견디면서 스스로 만들어 낸 아름다움이다.
사진은 사람에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난다고 하지만 사진의 신화는 풍경에 있고 또 그 풍경과의 만남은 기다림에 있다. 170년 전, 니엡스는 자기 집의 풍경을 찍기 위해 8시간이나 ‘오래 오래’ 기다렸다.
사진의 역사는 ‘빨리 찍기’를 위해 내달려 왔지만 여전히 오래 볼 때에 사진가의 속내가 배어든다. 동양에서는 그것을 원(遠)이라고도 하고 현(玄)이라고도 했다. 그것은 풍경 속에서 사진가가 도달해야 할 정신세계이며 목표였다. 풍경이라는 형질을 뛰어 넘어 그 곳에 정신과 영원을 불어넣음으로써 무한으로 가는 것, 정신적 해탈을 맛보는 것이 바로 원이고 현이다. 작가의 정신이 녹아든 작품이어야 대상이 갖는 형질을 국한성을 벗어나 무의 경지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주관적 정신과 객관적 대상이 작가의 풍경 속에서 평화롭게 동거한다.
그러나 그의 풍경은 동양의 산수화처럼 초점이 명확한 것도 아니고, 삶의 속박으로부터 무한한 자유로의 비상을 꿈꾸는 장자의 이상향도 아니다. 단지 사진기의 고립된 틀 안에서 그의 풍경을 꿈꾼다. 풍경은 3차원의 환영을 버리고 인화지 위에서 자신의 윤곽을 지워가며, 때로는 흔들리고 풀어지면서 아득히 소멸되어간다. 풍경은 견고하게 제 자리에 서 있지만 사진이 안에서 흔들린다. 모션 테크닉은 사진가가 대상을 움직이는 중요한 수단이다. 위에서 아래로, 좌측에서 우측으로 때로는 둥글게 원을 그리며 사진기를 움직이면서 신기하게도 대상도 따라 움직인다. 빠르게 움직이면 풍경은 모든 윤곽을 풀어버린다. 따라서 촬영 속도는 사진기의 움직이는 각도와 서로 조응하면서 화합을 이루어야 한다. 또 다른 움직임은 한 필름 위에 여러 차례 노출을 주는 것이다. 동일한 풍경도, 한 화면에 사진기의 위치와 거리를 변경하여 수차례 노출을 줌으로써, 앞서 찍은 잔상들과 겹쳐져 움직임을 얻는다. 여기서 사진기의 움직임(panning)과 다중 노출의 결합과 같은 변형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이 이와 같은 촬영의 어려움이다.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풍경들, 그것은 분명 이 땅의 모습을 찍은 것이지만 이 땅의 풍경은 아니다. 김석종의 풍경은 천연색이다. 사진기는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활동 사진기로서 기능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붓으로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한다. 화가처럼 자연스럽게 색을 칠하고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떠오르는 색을 김석종은 좋아한다.
사진가들 가운데 색과 움직임을 동물적으로 잡아낸 사진가는 E.하스 일 것이다. 그의 색은 대상이 움직임으로써(투우사 또는 공원의 놀이기구) 얻어지거나 원래 가지고 있는 색들의 대비를 통해서 강조된다.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대상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색을 그대로 쓰거나 바바라 카스텐처럼 조명에 필터를 사용하여 대상에 색을 입히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김석종은 대상을 겹침으로써 색을 얻는다. 그 색은 파스텔 톤을 갖는 중간색들이다. 하나의 풍경에서 중첩된 풍경으로의 전이, 정적인 대상에서 동적 움직임의 연출, 예기치 않은 발색 효과 등이 이제껏 보아온 스트레이트한 풍경사진들과 김석종 사진을 구별 짖게 하는 차이점일 것이다. 따라서 그의 풍경은 이 세상에 있는 풍경이지만 또 이 세상에 없는 풍경이다. 실제의 풍경으로 가상의 풍경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는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오간다.
사진은 기계적으로 재현하는 것도, 수정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다른 어떤 방법도 동원하지 않고 오직 스트레이트하게 찍음으로도 주관적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밖의 풍경을 거부함으로써 나만의 풍경을 만드는 기쁨은 얼마나 클 것인가? 사진기 앞에 현존하는 풍경도 그에게로 오면 그의 풍경이 된다. 사진가는 끊임없는 거부를 통해 오히려 대상과 교감의 통로를 찾고 그때 대상은 기계적 미학을 훌쩍 넘어, 하나의 의미로 비상한다. 사진가는 풍경 앞에 서서 그것을 기다린다. 그 울림을 기다린다. 아니, 그것에게로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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