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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에게서 강의를 듣는다.
로댕은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 조각의 단점을 자세히 지적하며,
가까이에 있는 남자모델을 부른다.
그리고 로댕은 모델의 목을 힘껏 비튼다.
목의 근육을 자세히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모델의 목은 보기 딱할 정도로 비틀어진다.
고통을 참는 듯한 모습이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 새겨진다.
하지만 진정 로댕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모델의 고통도 아니요,
비틀어진 목의 근육도 아니다.
정상적으로는 동작이 불가능한 목의 근육을 극대로 긴장시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조각의 구조를 표현하는 데 있다.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다.


모델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때,
외형보다는 내면의 생기를 표현하는 것이 조각의 어려움이다.
로댕은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델을 단지 보이는 대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느끼는 대상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그는 모델을 실제 이상으로 과장하고, 생략하고, 단순화함으로서
보이는 실물보다 큰 생동감을 얻는다.


실제로 예술가를 완벽히 만족시키는 모델은 없다.
있는 그대로 묘사해도 작품이 되는 모델을 없다.
제작하는 동안 예술가는 어떤 경우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중이든
자기의 의도를 모델을 통하여 작품에 투영시킨다.
이때 모델은 작가의 창작의 도구이지 절대적 이상은 아니다.


절대적 이상은 작가의 마음에 있다.
그러기에 한 모델을 놓고도 수많은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영화에서 로댕은 자기의 모델을 관찰하는 사고나, 방법을 까미유에게 전하고 있다.
그러나 까미유의 작품이 로댕의 작품 앞에서 유난히 우울해지는 것은
자기의사고와 방법이 아니라, 로댕의 사고와 방법 안에 갇혔기 때문이다.
작품은 작가의 내면을 외적으로 표출하는 작업이다.


표출하고자 하는 이미지의 끓어오르는 내적 열정은 작품의 내용이 되고,
이를 외적인 조형작업으로 드러낼 때 기법이 된다.
끓어오르는 열정의 내면적 감성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러나 기법이라는 것은 갈고 닦으면 그럴 듯 하게 모방할 수 있다.
하지만 기법을 잉태한 근원적 내용에는 이르기 어렵다.
내용이 기법을 만드는 것이지, 기법이 내용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내용은 각기 다른 기법을 생산하다.
이럴 때 기법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이 된다.


까미유는 유능한 작가이다.
그러나 까미유가 로댕 앞에서 로댕을 넘지 못하고 생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모름지기 작가는 자기의 사고와 방식대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예술에서 진정한 배움과 가르침은
서로를 얽매고 얽매이게 하는 위험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브랑쿠시는 거목 밑에서 나무는 자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를 벗어났고
부르델은 로댕의 문하에 있었지만 충분히 자기의 것으로 소화해 내면서 그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까미유는 그렇지 못했다.
까미유는 로댕의 절대적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안타까움은 로댕과 까미유의 작품이 함께 진열된 전시장에서 더욱 드러나 보였다.


홍순모 - 조각가, 이화여자대학교 조형대학 ,목포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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